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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양성 지킴이 일본의 ‘미니 시어터’, 위기 속 부활의 몸짓

입력
2024.01.08 04:3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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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플렉스·OTT 공습에 경영 위기
코로나 직격탄에 폐관 잇따랐지만
크라우드 펀딩 성공 등 부활 조짐

일본 요코하마시의 미니 시어터 '잭&베티'의 가지와라 도시유키 대표가 지난 2일 보유 중인 필름 영사기 앞에 서 있다. 이 영화관은 평소 디지털 영사기를 사용하지만 고전 작품을 상영할 때는 필름 영사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요코하마=최진주 특파원

일본 요코하마시의 미니 시어터 '잭&베티'의 가지와라 도시유키 대표가 지난 2일 보유 중인 필름 영사기 앞에 서 있다. 이 영화관은 평소 디지털 영사기를 사용하지만 고전 작품을 상영할 때는 필름 영사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요코하마=최진주 특파원

"도쿄에서 가나가와현의 소도시로 이사한 뒤 주변에 영화관이 많지 않아 자주 못 가게 됐어요. 대신 넷플릭스 같은 서비스로 집에서 영화를 봤는데, 보면 볼수록 '역시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고 깨달아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작년엔 10대 때 인상적으로 봤던 영화 '류지'가 개봉 40주년을 맞아 재개봉했는데, 추억의 영화를 다시 한번 볼 수 있어서 매우 좋았습니다."

지난 2일 오후 방문한 일본 요코하마시 나카구 와카바초의 미니 시어터 '잭&베티'에서 열린 관객과의 교류 모임 중 한 참가자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매월 1일 '영화의 날'에 개최하는 이 모임엔 잭&베티의 가지와라 도시유키 대표가 직접 참석해 10여 명의 관객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가지와라 대표는 "2007년 영화관 인수 후 초반에 관객이 적어 고민하다 이듬해부터 교류회를 시작했다"며 "15년 동안 계속된 모임을 통해 관객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져, 이들의 취향에 맞는 영화를 선정하는 '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모임에선 현재 진행 중인 잭&베티의 인터넷 크라우드 펀딩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경영 악화로 궁지에 몰렸던 이 영화관은 밀린 공공요금과 세금 납부, 엘리베이터 수리, 디지털 영사기 교체 등을 목적으로 지난해 11월 27일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했다. 목표액이 3,000만 엔(약 2억7,200만 원)이라 너무 높다고 우려했으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불과 2주 만에 목표액을 달성했다.

1952년 문을 연 '명화좌(名画座)'의 뒤를 이어 1991년 문을 연 잭&베티는 이미 2005년 경영 악화로 한 차례 폐관한 바 있다. 지역 운동을 하던 가지와라 대표 등이 2007년부터 운영을 맡으면서 교류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사회와 다양한 접점을 마련해 손님이 전보다 늘긴 했지만, 팬데믹을 거치며 다시 경영 상황이 악화하자 마지막 수단으로 펀딩을 시도했다. "80년 동안 이 자리에서 좋은 영화를 상영해 온 극장을 지켜야 한다"는 절실한 호소에 요코하마 시민은 물론, 도쿄 등 다른 지역 영화 팬도 뜨겁게 응답했다. 가지와라 대표는 "이렇게 빨리 목표액을 달성할지 정말 몰랐다"며 "미니 시어터 문화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효과까지 얻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요코하마시의 미니 시어터 '잭&베티'에서 가지와라 도시유키(뒤쪽 가운데) 대표와 관객들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교류 모임을 갖고 있다. 요코하마=최진주 특파원

일본 요코하마시의 미니 시어터 '잭&베티'에서 가지와라 도시유키(뒤쪽 가운데) 대표와 관객들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교류 모임을 갖고 있다. 요코하마=최진주 특파원


일본 개봉작 70%는 미니 시어터에만 걸린다

미니 시어터란 대형 영화사나 배급사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체 판단으로 영화를 골라 상영하는 소규모 영화관을 뜻하는 일본식 영문 조어다. 한국에선 '예술영화관'이나 '독립영화관'으로 불리지만 미니 시어터에서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만 상영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흥행 영화를 TV가 아닌 극장에서 보고 싶어 하는 관객을 위해 상영하기도 하고, 특정 감독의 영화를 집중적으로 상영해 해당 감독의 팬들을 불러 모으기도 한다.

잭&베티의 1월 첫 주 상영 프로그램을 보니, 지난해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인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년)를 비롯해 임순례 감독의 '교섭'(2023년), 프랑스와 오종 감독의 '내 범죄'(2023년), 크리스티안 문자우 감독의 'R.M.N.'(2022년) 등 비교적 최근 개봉한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았다. 세르비아의 거장 감독 에밀 쿠스트리차의 '언더그라운드'(1995년)와 '돌리 벨을 아시나요'(1981년) 등 유명한 고전 작품도 상영하고 있었다.

이런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은 막대한 투자가 들어간 블록버스터 영화 대신 작지만 의미 있는 영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영화를 선호하는 이들이다. 이날 막 '언더그라운드'를 보고 나온 50대 남녀는 "미니 시어터에서 상영하는 개성적인 영화를 좋아해, 한 달에 서너 번은 극장에 간다"며 "한국 영화도 미니 시어터에서 많이 봤다"고 말했다. 이들은 도쿄에 살지만 "잭&베티는 다른 미니 시어터가 문을 닫는 정초에도 문을 열기 때문에 매년 1월 초엔 이곳에 와서 영화를 본다"고 말했다.


일본 요코하마시의 미니 시어터 '잭&베티' 전경. 요코하마=최진주 특파원

일본 요코하마시의 미니 시어터 '잭&베티' 전경. 요코하마=최진주 특파원

일반 영화관과 다른 작품을 상영하니, 흥행작 목록도 대형 영화관과는 판이하다. 지난해 잭&베티 최대 흥행작은 '하마노돈'이란 다큐멘터리였다. 요코하마에 카지노를 포함한 복합시설을 유치하려던 스가 요시히데 전 일본 총리, 자민당 정치 세력에 대항해 이 지역 항만산업을 일군 '대부'인 후지키 유키오(93)가 지역 시민과 함께 반대 운동을 벌인 실화를 담았다. 그는 요코하마 시장 선거에서 무명 후보를 내세워 현직 시장을 꺾음으로써 결국 카지노 유치 계획을 저지했다.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인 줄 착각해 외지에서 온 일본인을 학살한 사건을 다룬 '후쿠다무라 사건'도 지난해 흥행작 중 하나다. 이처럼 일본 대형 영화관이 기피하는 정치적 주제나 한일 역사 문제 등을 다룬 영화도 미니 시어터에선 흥행을 기록하곤 한다.

일본 사단법인 커뮤니티 시네마센터가 매년 발행하는 '영화상영활동연감'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일본 내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359곳, 미니 시어터는 136곳에 달한다. 이 중 멀티플렉스가 3,244개 스크린을 갖고 있고, 기타 영화관의 스크린 수는 426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코로나 확산 전인 2019년 일본에서 공개된 영화 1,292편 중 약 70%는 미니 시어터에서 상영됐다. 미니 시어터가 없다면 아예 상영할 곳을 잃는 영화가 절반을 훌쩍 넘는다는 뜻이다. 버블기인 1980년대 유럽 예술영화에 대한 선호 현상과 함께 '미니 시어터 운동'이 일어난 뒤, 이런 작은 상영관들은 일본 영화계 다양성을 지키는 창작의 보루가 돼 왔다. 특정 영화의 스크린 독점 현상이 심각하고 대규모 자본을 투입해 '천만 영화'를 목표로 하는 상업영화에만 투자가 집중되는 한국과 다른 점이다.

일본 영화관의 스크린 수 증가 추이. 2000년부터 멀티플렉스와 기타 영화관의 스크린을 구분해 집계했고, 푸른색이 멀티플렉스, 연두색이 기타 영화관의 스크린 수를 가리킨다. 2022년 일본영화활동연감 캡처

일본 영화관의 스크린 수 증가 추이. 2000년부터 멀티플렉스와 기타 영화관의 스크린을 구분해 집계했고, 푸른색이 멀티플렉스, 연두색이 기타 영화관의 스크린 수를 가리킨다. 2022년 일본영화활동연감 캡처


멀티플렉스·OTT 등장에 위기 맞아

일체의 정부 지원 없이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일본의 미니 시어터 운동은 다른 나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2000년대 멀티플렉스 영화관 등장과 함께 빠르게 퇴조하기 시작했다. 대형 스크린과 화려한 음향 시설이 갖춰진 영화관을 선호하는 관객이 늘었고, 여러 스크린을 채우기 위해 대형 영화사나 배급사도 과거엔 미니 시어터에서 상영됐을 법한 작품성 있는 영화에 손을 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는 넷플릭스 등 OTT 서비스까지 등장하면서 TV로 고전 영화부터 신작 영화까지 개인 취향에 맞는 영화를 골라 볼 수 있게 됐다. 여기에 2020년 코로나19의 확산은 결정타를 날리며 여러 미니 시어터의 문을 닫게 했다. 특히 1958년 개관해 '예술영화의 성지'로 불렸던 도쿄의 '이와나미 홀'이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2022년 폐관한 것은 영화계에 큰 충격을 줬다.


일본 요코하마시의 미니 시어터 '잭&베티'에서 지난 2일 관객들이 표를 사거나 영화 관련 상품을 구매하고 있다. 요코하마=최진주 특파원

일본 요코하마시의 미니 시어터 '잭&베티'에서 지난 2일 관객들이 표를 사거나 영화 관련 상품을 구매하고 있다. 요코하마=최진주 특파원

하지만 팬데믹이 종료된 지난해부터 미니 시어터가 다시금 부활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 경영이 악화한 미니 시어터의 크라우드 펀딩 성공 사례는 잭&베티만이 아니다. 작년 7월 나고야를 대표하는 미니 시어터 '나고야 시네마 테크'가 개관 41년 만에 문을 닫았지만, 이 자리에 올해 '나고야 키네마 노이'란 이름의 미니 시어터가 새롭게 태어난다. 이를 가능케 한 것도 크라우드 펀딩이었다. 지난해 12월 초 펀딩이 시작되자마자 불과 이틀 만에 1,000만 엔(약 9,000만 원)의 목표 금액을 달성했고, 1월 5일 현재 2,029만 엔(약 1억8,300만 원)까지 모였다. 펀딩 초기에 유명 가수 겸 배우인 고이즈미 교코, 다큐멘터리 감독 모리 다쓰야, '수프와 이데올로기' 등으로 유명한 양영희 감독 등이 프로젝트를 응원한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엔 새 미니 시어터의 개관도 오랜만에 크게 늘었다. 성상민 문화평론가가 집계한 결과, 재일동포 소설가인 유미리 작가가 후쿠시마현에 만든 '레인 시어터'(Rain Theater)를 비롯해 오카야마현의 '조토쓰야마시네마’, 오사카시의 '오기마치 키네마', 야마구치현의 '시모노세키 시네마포스트', 와카야마현의 '시네마203', 사이타마현의 '제3전영(電影)', 고치현의 '키네마M', 도쿄의 '키노 시네마 신주쿠' 등 무려 8개 미니 시어터가 작년에 새롭게 오픈했다. 성 평론가는 "한편에선 오래된 극장이 회원 고령화 등으로 문을 닫고 있으나, 다른 한편에선 새로운 극장이 문을 열고 있다"며 "대형 상업영화가 아닌, 다양한 영화를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극장에서 보고 싶어 하는 영화팬들은 계속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요코하마시의 미니 시어터 '잭&베티'의 상영관 내부. 요코하마=최진주 특파원

일본 요코하마시의 미니 시어터 '잭&베티'의 상영관 내부. 요코하마=최진주 특파원


요코하마=글·사진 최진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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