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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회복세에 '갑'이 된 일본 취준생… 구인난 기업은 인력 확보 안간힘

입력
2024.03.18 04:3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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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전·대면 탐색전'… 유인책 꺼낸 기업
초봉 20% 올리고 인재 미국 여행 제공도
'대학 선배·부모' 이용해 입사 확정 유도

일본 취업 준비생들이 9일 취업 사이트 마이나비 주최로 도쿄 국제전시장 빅사이트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서 일본 항공사 ANA 부스를 구경하고 있다. 도쿄=류호 특파원

일본 취업 준비생들이 9일 취업 사이트 마이나비 주최로 도쿄 국제전시장 빅사이트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서 일본 항공사 ANA 부스를 구경하고 있다. 도쿄=류호 특파원


겨울에 합격 통보는 받았지만 제가 골라 갈 수 있으면 좋잖아요. 저에게 맞는 회사를 더 찾아보려고요.

일본 취업 준비생 모리야마 나오미(가명)

지난 9일 일본 도쿄 최대 국제전시장 빅사이트에서 만난 도쿄 소재 사립대 3학년생 모리야마 나오미(가명·21)는 요즘 취업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이날 취업 사이트 '마이나비'가 주최한 취업박람회에서 필요한 정보를 구하러 다니고 있었다. 이 취업박람회에서는 일본 3대 메가뱅크(미쓰비시UFJ·미쓰이스미토모·미즈호)를 비롯한 금융업체, 일본 항공사 ANA는 물론 방송사까지, 취업 준비생이라면 누구나 일하기를 꿈꾸는 일본 기업들이 부스를 꾸리고 학생들을 맞았다.

모리야마의 발걸음은 미쓰비시UFJ 부스 앞에서 멈췄다. 설명회 시간이 되자 자리를 잡은 모리야마는 채용 담당자의 말을 꼼꼼히 받아 적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옆에서 안내하던 직원에게 다가가 질문도 던졌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이미 올해 초 한 식품기업에 합격한 '예비 사원'이었기 때문이다.

한 일본 시민이 지난달 26일 도쿄 시내에서 일본 닛케이225 평균주가(닛케이지수)가 적혀 있는 증시 현황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도쿄=AFP 연합뉴스

한 일본 시민이 지난달 26일 도쿄 시내에서 일본 닛케이225 평균주가(닛케이지수)가 적혀 있는 증시 현황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도쿄=AFP 연합뉴스

모리야마는 "보험은 들어놨으니 이제는 가고 싶은 곳에 원서를 넣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본인만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빳빳한 새 정장을 입고 박람회장을 돌아다니는 학생 중 상당수가 이미 기업 1곳 이상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일본의 장기 경기 침체를 상징하는 '잃어버린 30년'이 끝나가고 경제가 회복되면서 일본 기업들은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취업 준비생은 '갑'이 됐고, 각 기업은 이들을 붙잡기 위해 각종 아이디어를 쏟아내며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합격' 통보받은 취준생 벌써 40%

최근 5년간 일본 취업률 추이. 그래픽=이지원 기자

최근 5년간 일본 취업률 추이. 그래픽=이지원 기자

모리야마처럼 취업 준비생들이 회사를 골라 가는 상황이 되면서 직접 마주 보고 정보를 얻는 '대면 탐색전'이 요즘 일본 취업 시장의 트렌드가 됐다. 대면 취업 시장이 활기를 띠는 건 경기 회복세와 함께 코로나19로 인한 갈증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코로나19가 본격화한 2020년부터 모든 채용 과정을 온라인으로 진행했지만 이제는 현장에서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됐다.

일본 편의점 기업 훼미리마트 관계자는 "기업과 학생들이 직접 만날 기회는 올해부터 완전히 열렸다고 봐야 한다"며 "확실히 작년보다 많은 학생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 수도권 소재 국공립대 3학년생 아베 나오키(가명·22)는 "온라인으로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데 현장에 오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면서 궁금한 사항들을 편하게 물을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지난 1일부터 기업들의 공개적인 '채용 홍보 활동 금지 기간'을 해제하면서 2025학년도에 졸업하는 대학생, 대학원생들의 취업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기업과 취업 준비생 간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늘면서 대학 3학년생과 대학원 1학년생들은 일본 전역에서 열리는 취업 박람회를 찾아다니고 있다. 일본 대학생들은 보통 3학년 2학기부터 취업 활동을 시작해 4학년 1학기까지는 입사할 회사를 결정한다.

2021~2024년(매해 3월 1일 기준) 일본 기업으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은 취업준비생 비율. 그래픽=이지원 기자

2021~2024년(매해 3월 1일 기준) 일본 기업으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은 취업준비생 비율. 그래픽=이지원 기자

안 그래도 취업 시기가 한국보다 빠른 일본이지만, 경기가 살아나면서 시점이 훨씬 앞당겨졌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취업 정보 기업 '디스코'가 2025학년도 졸업 예정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월 1일 기준 입사 시험을 치른 학생은 71.3%에 달했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3.1%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취업을 일찌감치 확정하고 남은 대학 생활을 여유롭게 보내는 학생도 늘었다. 취업 정보 기업 리쿠르트에 따르면 이달 1일 기준 입사 합격 통보를 받은 2025학년도 졸업 예정 취업 준비생은 40.3%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30.3%)보다 10%포인트나 늘었고, 2021년(17.6%)과 비교하면 2배 이상으로 뛰었다.

일본 취업 준비생들이 9일 취업 사이트 마이나비 주최로 도쿄 국제전시장 빅사이트에서 열린 취업박람회 내 미쓰비시UFJ은행 부스에서 설명회를 듣고 있다. 도쿄=류호 특파원

일본 취업 준비생들이 9일 취업 사이트 마이나비 주최로 도쿄 국제전시장 빅사이트에서 열린 취업박람회 내 미쓰비시UFJ은행 부스에서 설명회를 듣고 있다. 도쿄=류호 특파원

그러나 많은 취업 준비생이 여기에서 취업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디스코 조사에서 합격 연락을 받은 취업 준비생(33.8%, 2월 1일 기준) 중 '이제 취업 활동을 그만하겠다'고 답한 비율은 겨우 5.7%뿐이었다. 많은 학생이 기업의 공개 홍보 활동 시즌부터 '취업 장기전'에 돌입했다는 얘기다.

이때부터는 업종과 연봉만 보는 게 아니다. 사무실 분위기,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재택근무 여부 등을 꼼꼼히 따져가며 자신에게 딱 맞는 회사를 찾는 식이다. 온라인에서는 얻기 힘든 정보들인 만큼 장기전에 뛰어든 학생들은 대면 구직 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글로벌 정보기술(IT)업체 위프로재팬 이승원 채용총괄은 "이제 학생들의 선택지가 많아졌다. 5, 6개 기업에 합격한 취업 준비생도 많을 것"이라며 "업무 공간과 같이 일할 사람들의 첫인상, 이 회사에 들어갈 경우 자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따져보는 게 최근 일본의 분위기"라고 전했다.

기업들이 내놓은 '비장의 카드'

장기전을 준비하는 학생이 많아지면서 기업들은 이들을 붙잡기 위해 온갖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다. 요즘 기업들의 비장의 카드는 대학 선배와 부모다. 보험 업체 도쿄해상니치도는 매달 합격자들과 입사 선배가 만나는 이벤트를 연다. 회식일 때도 있고, 1박 2일 일정의 워크숍일 때도 있다. 합격자들과 선배가 팀을 이뤄 나들이를 가거나 회사가 준 팀워크 과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선배들이 사회생활을 잘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자리이면서, 회사 입장에서는 합격자와 얼굴을 마주하며 입사 최종 확답을 유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도쿄해상니치도 관계자는 "선배들과의 시간은 물론 입사 예정자끼리 자주 보면 '앞으로 나와 같이 일할 동료'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며 "동료애로 높아진 친밀도가 입사를 결정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 기업 채용 담당자들이 9일 도쿄 국제전시장 빅사이트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서 취업 준비생들을 맞이하고 있다. 도쿄=류호 특파원

일본 기업 채용 담당자들이 9일 도쿄 국제전시장 빅사이트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서 취업 준비생들을 맞이하고 있다. 도쿄=류호 특파원

입사를 결정하지 않았는데 해외 연수를 보내주는 회사도 등장했다. 일본의 한 대형 IT업체는 합격자 중 성적이 우수한 소수 인원을 추려 일주일짜리 미국 연수를 제공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엄청난 혜택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미래를 위해 반드시 붙잡아야 할 인재들인 만큼 각별히 공을 들인 셈이다.

임금을 파격적으로 올린 곳도 있다. 부동산 개발업체 하세코코퍼레이션은 대졸 신입사원 월급을 4만5,000엔(약 40만 원) 인상했다. 가구·사무용품 제조업체 코크요는 신입사원 초봉을 20% 올린 것은 물론 근속 연수와 상관없이 승진할 수 있는 제도도 도입했다. 아르바이트생에게 손을 내미는 회사도 있다. 로손은 올해 채용 예정인 신입사원의 30%를 아르바이트생으로 채울 예정이다.

학생들에게 '좋은 기업'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제도 혁신도 마다하지 않는다. 스미토모상사는 신입사원 채용 면접 때 학생이 직접 면접관을 평가하는 제도를 도입할 예정이다. 면접관이 부적절한 발언을 했는지 평가하는 것은 물론, 회사 경영 방침과 분위기를 면접자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는지도 묻기로 했다.

구직자들이 지난해 5월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3 일본 유학·취업박람회를 찾아 상담을 받고 있다. 뉴시스

구직자들이 지난해 5월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3 일본 유학·취업박람회를 찾아 상담을 받고 있다. 뉴시스

이런 유인책까지 제시했는데도 입사를 머뭇거린다면 그다음 쓰는 카드는 부모다. 일본 취업 시장에서는 '오야카쿠'란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부모(親·오야)'와 ‘확인(確認·가쿠닌)'의 첫 글자를 따 만든 신조어로, 기업이 채용하고 싶어 하는 학생이 마음을 바꾸지 않게 미리 부모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자녀 입장에서 부모의 설득을 쉽게 뿌리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 엔터테인먼트 업체 채용 담당자는 "면접 이후 마음을 바꾸는 학생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며 "최후의 수단으로 오야카쿠를 통해 입사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사례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이러한 취업 분위기가 기업에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반대로 채용 과정에서 더 꼼꼼하게 보고 뽑을 수 있어 회사에 적합한 인재를 찾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채용총괄은 "일본 기업들은 신입사원을 뽑을 때 인성과 잠재적 능력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대면 기회가 많아지다 보니 학생들의 평소 태도를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도 늘었다"고 설명했다.







도쿄= 류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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