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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연금개혁 반대 200만 시위, '프랑스적인'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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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연금개혁 반대 200만 시위, '프랑스적인' 이유가 있었다

입력
2023.02.01 04:30
수정
2023.02.01 07:21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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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프랑스 전역 200여 곳 대규모 집회
"프랑스의 가치를 훼손 말라" 한 목소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연금개혁을 반대하며 거리로 나온 시민들이 31일(현지시간) 거리에서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파리=AP·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연금개혁을 반대하며 거리로 나온 시민들이 31일(현지시간) 거리에서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파리=AP·연합뉴스

프랑스 국민 약 70%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연금개혁을 반대한다. 응축된 불만은 31일(현지시간) 프랑스 전역에서 열리는 연금개혁 저지 시위에서 화산처럼 터졌다.

'마크롱 안'의 핵심은 "연금 수령 시점인 정년퇴직 연령을 현행 62세에서 2030년까지 64세로 올리고, 연금 100% 수령을 위한 근속 연수를 현행 42년에서 43년으로 늘린다"는 것이다. "더 오래 일하라"는 뜻이니, 동의하기 쉽지 않다.

한국일보가 파리에서 확인한 민심은 "더 일하는 게 싫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분노엔 다층적 이유가 섞여 있었다. 그 중심엔 '일과 삶의 균형 추구', '시민들이 일군 사회적 합의의 존중', '소수자·약자에 대한 배려' 등 프랑스인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마크롱 대통령이 훼손하고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프랑스 파리의 이탈리아 광장에서 31일(현지시간)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의 연금개혁을 저지하려는 시위가 열리고 있다. 파리=로이터·연합뉴스

프랑스 파리의 이탈리아 광장에서 31일(현지시간)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의 연금개혁을 저지하려는 시위가 열리고 있다. 파리=로이터·연합뉴스


전국 200여 곳 시위... "100만 명 이상 참가" 관측

정부의 연금개혁 강행을 막기 위한 2차 총파업 및 시위가 전국 약 200여 곳에서 진행됐다. 주요 노동조합 8개가 모두 참여하는 초대형 시위다. 노조는 200만 명 이상이 모일 것이라고 일찌감치 자신했다.

오후 2시 공식적으로 시작된 수도 파리의 시위엔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했다. '이탈리아 광장'을 중심으로 뻗은 거리는 시위 전부터 인파로 꽉 찼다. 시위대는 마크롱 정부를 규탄하며 앵발리드를 거쳐 보방광장까지 6㎞ 가량을 행진했다. "누구도 연금개혁을 원한 적이 없다" 등 구호가 울려 퍼졌다. 노조를 비롯한 시민단체의 풍선·현수막이 설치됐고, 깃발이 휘날렸다. 시위는 해가 질 때까지 이어졌다.

19일 열린 1차 시위 때보다 열기가 뜨거워졌다는 게 시민들 말이다. 이미 한 차례 시위로 민심이 확인됐지만 마크롱 정부는 타협 여지를 보이지 않아서다. 전국자치노동연맹 소속 올리버씨는 "마크롱 정부가 민의에 반하는 연금개혁을 포기할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야당들도 부스를 차리고 정권 견제에 나섰다.

경비도 삼엄했다. 분노한 시위대가 '돌발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본 정부는 전국적으로 1만1,000명의 경찰을 배치했다(파리 4,000명 포함). 일부 경찰은 총을 들고 있었다. 광장으로부터 약 1㎞ 떨어진 지점까지 차벽이 설치됐다. 곳곳에 바리케이트가 놓였다. 광장 옆에 위치한 쇼핑몰 '이탈리 두'는 건물에 입장객들의 소지품을 검사했다.

대중교통을 비롯한 각종 인프라는 마비됐다. 그러나 시위로 인한 불편을 호소하는 목소리보다 시위를 지지하는 것이 파리의 분위기였다. 이탈리아 광장 옆에 있는 파리13구 구청의 한 공무원은 "프랑스는 공무원도 파업에 자유롭게 참여하는 국가"라며 "우리 모두는 광장을 누릴 자유가 있다"고 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31(현지시간) 열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연금개혁 저지 집회에서 자유의 여신상 복장을 한 시민이 반대 구호가 적힌 판을 들어보이고 있다. 파리=신은별 특파원

프랑스 파리에서 31(현지시간) 열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연금개혁 저지 집회에서 자유의 여신상 복장을 한 시민이 반대 구호가 적힌 판을 들어보이고 있다. 파리=신은별 특파원


광장의 분노엔... "'프랑스의 가치'를 훼손 말라" 외침

프랑스인들의 분노엔 여러 결이 있었다.

①우선 '마크롱 안'이 소중한 '일과 삶의 균형'을 해칠 것이라고 봤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해 노년을 여유롭게 보내는 현행 연금제도를 프랑스인들은 '기본값'으로 여긴다. '자부심'도 대단하다. 에르브씨는 "우리는 노인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현재의 제도에 많은 애착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법정 정년(62세)은 국제사회(60대 중후반)보다 낮으니 올려야 한다"는 마크롱 대통령의 논리가 먹히지 않는 이유다. 전국고등학생총연맹 소속 줄리안은 "정부는 '미래 세대'를 핑계 삼아 유럽연합(EU)의 기준을 프랑스에 심으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②연금개혁이 '노동시장 약자'의 권리를 더 많이 침해할 것이란 의견도 많았다.

노조는 "'더 오래 일하라'는 연금개혁은 정신적·육체적으로 고된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의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반발한다. 교육을 받을 기회가 충분하지 않아 노동시장에 일찍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 등이 잠재적 피해자다.

특히 여성에게 불리하다는 점은 정부도 수긍한 부분이다. 정부가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마크롱 안'을 적용했을 때 남성은 5개월 더 일하게 되지만, 출산 휴가 등으로 인한 업무 공백이 큰 여성은 7개월을 더 일해야 한다.

불평등 문제도 있다. 자산이 적을수록 연금 수령 지연 타격이 커지기 때문이다. 정부는 노인 고용을 활성화하겠다지만, 일자리가 한정된 상황에서 노인 고용을 늘리면 청년에게 할당되는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도 문제다.

파리 피에르 마리 퀴리대 재학생 A씨는 "연금개혁 필요성은 인정한다"면서도 "약자를 위한 고려가 더 필요하다는 의견은 정부가 새겨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론조사기관 엘라베 여론조사에서 마크롱 안이 "공정하다"는 답변은 8%에 불과했다. 프랑스인들을 광장으로 향하게 한 원동력이 '약자에 대한 연대'였을 수 있다는 뜻이다.

③많은 이들은 연금개혁이 '사회적 합의를 깨는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현재의 연금제도는 계약과 합의의 산물인데, 프랑스 정부가 '시민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제도를 바꾸려 한다는 것이다. 파리 시민 미카엘 브리딘씨는 "시민들이 쟁취한 권리를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결정은 시민들이 한다"고 잘라말했다. 연금개혁이 필요하다고 보는 이들조차 "대화가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한 안이므로 '지금 당장' 시행하는 건 너무 이르다"(대학생 마논씨)고 한다.

정부라는 공공의 적이 있어서인지, 시위 현장에서 세대 간 갈등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전체적인 시위를 노조가 주도하고 있는 만큼, "자본가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 연금제도를 살리라"는 목소리가 많이 들렸다. "연금제도가 프랑스 정부의 말처럼 반드시 살려내야 할 '공적인 것'이라면, 사회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보는 자본가들이 더 희생해야 하는 게 맞는다"는 논리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30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헤이그=AFP·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30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헤이그=AFP·연합뉴스


④"연금제도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는 정부의 주장에 대한 불신도 컸다.

불신의 근거도 명확했다. 프랑스 연금오리엔테이션위원회(COR)가 지난해 9월 발표한 보고서는 "2032년까지 연금 재정은 상당한 적자가 예상되나, 점진적으로 균형을 찾을 것"이라는 취지로 진단했다. 프피에르 루이스 브라스 COR 회장은 최근 국회에서 "연금제도는 '통제 불능'의 상태가 아니다"고 거듭 확인했다.

프랑코이제씨는 "'재정적 비상사태'라는 정부 말과 달리, 정부 재정은 위험에 처해있지 않다"고 말했다. 노조도 "마크롱 대통령이 거짓말을 한다"고 비판한다.

⑤연금개혁의 효과성에 대한 의문도 상당했다.

저출생·고령화 상황을 해결하지 않으면 연금제도는 언젠가 또 손질을 해야 하므로, 굳이 무리해서 개혁을 추진할 필요가 없다는 게 많은 이들의 생각이었다. 대학생 아폴린(20)씨는 "연금제도가 존재하는 한 고통은 유예되는 것에 불과하다"며 "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생 릴리(20)씨는 "40년 뒤 나는 연금을 받을 수 있을까"라며 냉소했다. 엘라베 여론조사에서도 "당장의 연금개혁은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이 62%였다.

코로나19,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을 겪으며 경제가 어려워진 상황이라 연금개혁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는 이들도 많았다.

파리 신은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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